조직통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는 ABB

스웨덴 굴지의 엔지니어링회사 ASEA를 1980년부터 이끌어오던 퍼시 바르네빅(Percy Barnevik)회장은 1988년 이 회사를 스위스의 경쟁사인 브라운 보베리(Brown Boveri)와 합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세계최대의 종합엔지니어링회사 ABB(Asea Brown Boveri)이다. ABB는 그 후 동유럽·아시아 등지에서 적극적인 인수합병에 나선다. 그 결과 이 회사는 오늘날 세계 140개국에 약 1,300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 안에는 5,000개 정도의 이익센터(profit center)가 있다. ABB의 종업원수는 약 21만명이며, 연간매출액은 300억 달러를 넘는다 . 그러면 ABB는 이렇게 거대하고 다양한 조직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먼저 바르네빅의 기본적인 생각을 알아보자.

다문화 다국적의 개념

바르네빅 회장은 합병 후 ABB의 본사를 스위스 쮜리히로 옮긴다. 스웨덴 회사가 스위스회사를 인수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또 본사의 인원을 170명 정도로 크게 줄였으며, 영어를 회사의 공식언어로 정한다. 그는 내부벤치마킹(internal benchmarking)기법을 경영에 도입하는 등 매우 혁신적인 경영자인데 그의 아이디어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다문화 다국적(multicultural multinational)"이라는 개념이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그 뜻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오늘날 세계각국의 정부가 점차 규제를 완화하고 있고, 각종 정보 및 여행자들이 쉽게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한 나라에만 기반이 있는 기업은 앞으로 전망이 없다. 그러나 어차피 각 나라의 시장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기업은 현지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따라서 기업은 통일성과 다양성을 고루 갖춘 조직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조직을 바르네빅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각국의 여러 가지 취향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지만, 또 내부적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는 각 부분을 합친 것 이상이 되는 세계화된 기업집단(cosmopolitan conglomerate)」

조직개혁의 철학과 기본방향

흔히 ABB에는 세 가지의 역설(paradox)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범세계적(global) 회사이면서 현지회사(local company)이다. 둘째, 대규모이면서 동시에 소규모조직인 것처럼 움직인다. 셋째, 분권화를 하면서 보고·관리를 중앙에 집중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역설은 현대의 거대기업이 안고 있는 과제 그 자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ABB는 오늘날 대기업이 조직개혁을 하려고 할 때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바르네빅은 인간의 지력(知力)과 창조력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기업의 가치와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보고, 조직개혁의 주안점을 그러한 개인과 조직의 활력을 끌어내는데 두었다. 따라서 그의 조직개혁의 기본방향은 ABB를 구성하는 각 개인의 활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며, 또 한 나라에만 기반이 있던 사업을 이른바 글로벌·비지니스·플래트폼(global business platform)에 올려 연결 또는 규모의 경제를 발휘하게 함으로써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먼저 개인의 창조력과 기업가정신이 회사의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 보는 바르네빅 회장의 철학은 조직을 되도록 이면 편편하게(flat) 하고, 작은 집단으로 세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ABB가 조직을 세분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 지식을 원활하게 창출하고 잘 활용하며, 또 그것을 착실하게 축적해 가는 조직을 만들기 위한 경영방식을 확립하도록 한다.

– 구성원의 수를 적게 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 쉽게 이루어지고 목표를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하며, 협동의식을 높이고 기업가정신을 발휘하도록한다.

 

사업조직의 통합

그러면 ABB는 이렇게 세분화·분권화 된 조직을 어떻게 통합하고 있는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쮜리히에 있는 이 회사의 본사는 그 규모가 매우 작다. 즉 ‘작은 본사’가 ABB의 특징의 하나이다. ABB본사의 기능은 각 사업부 및 자회사의 활동을 조정·평가·계획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대외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섭외활동이 그 중심기능이며, 굵직한 사업단위를 평가하는 일도 하고 있다. 또한 앞으로의 경쟁에 대비해서 중장기 비전 및 장기전략을 세우고 경영자원을 통합하는 등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도 본사의 책임이다.ABB의 방대한 사업조직을 통합하는 가장 높은 기관은 이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사회로부터 권한위양을 받은 그룹경영위원회가 실제경영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이다. 이 위원회는 다섯 개의 사업영역, 즉 발전기기(power generation), 송전·변전·배전(power transmission and distribution), 산업기기·빌딩시스템(industrial and building system), 수송기기(transportation), 금융서비스(financial service)영역의 각 총괄부사장과 3명의 각 지역총괄책임자 등 모두 8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업영역의 밑에는 46개의 사업부문이 있으며, 그 아래에 약 5,000개의 이익센터가 있다 (그림 V-15 참조). 각 사업부문은 범세계적인 사업단위를 통합하고, 사업계획의 수립 및 시행을 담당하는 이른바 제품별 사업본사이다. ABB에는 사업영역의 총괄부사장과 이익센터의 사원사이에 단계가 5개 밖에 없기 때문에  ‘재빠른 적응’이 가능하다.

 

정보네트워크 및 기업가치관의 공유

 이렇게 ABB의 조직은 5,000개에 달하는 이익센터가 전세계에 퍼져 있고 본사는 최소한의 기능만 수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조직이 잘 운영되려면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정보네트워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ABB의 조직은 네트워크형 조직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보네트워크가 잘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그림 V-14 참조). 그러나 정보네트워크가 잘 갖추어졌다고 이러한 조직이 잘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 더불어 모든 구성원이 회사의 목표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ABB는 이러한 가치관의 공유를 실현하기 위한 ‘고객중심(Customer Focus)'이란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TBM(time-based management), TQM(total quality management), SM(supply management)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원칙을 갖고 있다.

– 고객중심의 경영

– 공급업자와의 한동아리의식(partnership)의 확립

– 최고의 품질

– 사업주기(business cycle)의 단축에 의한 경쟁우위의 확립

– 최고의 사원

바로 이러한 프로그램 덕분에 세분화 ㆍ분권화된 ABB라는 조직이 자율적으로 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엘리트 글로벌경영자들

그런데 조직의 운영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 짜여진 조직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이 유능하지 못하면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ABB의 가장 귀중한 자산은 이 회사가 자랑하는 약 500명의 엘리트 글로벌경영자들이다. 바르네빅 회장은 이들을 매우 신중하게 선발하며, 이들의 경력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통상 세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순환근무하는 그들은 조직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의 구실을 한다. 그들은 또 세계 각지에서 얻은 지식ㆍ노하우를 회사내에 퍼뜨리고, 회사의 경영진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등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글로벌ㆍ비지니스ㆍ플래트폼

바르네빅 회장의 철학을 반영한 세분화ㆍ분권화 외에 ABB의 조직설계에서 크게 눈에 띄는 점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개별적으로 보면 경쟁우위를 갖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세분된 조직단위(보통  현지의 사업부)가 정보네트워크로 연결됨으로 말미암아 부품의 조달이나 제조 등의 면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ABB가 한 나라만을 상대하던 현지사업(local business)을 글로벌ㆍ비지니스ㆍ플래트폼(GBP)에 올려 그것을 글로벌사업(global business)으로 바꿈으로써 국경을 넘어선 규모 및 연결의 경제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ABB는 또 이렇게 GBP를 통해 세계적인 규모로 사업을 전개하게된 사업부서에게 세계 각지의 연구소에서 축적한 연구성과를 제공함으로써 그것의 경쟁력을 더욱 높이고 있다.

 

조직통합에 의한 경쟁우위의 실현

앞으로의 지식사회에서는 회사 안에 흩어져 있는 지식을 잘 결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다양한 경영자원을 잘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기업경쟁력의 열쇠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미리 간파한 ABB는 조직을 소규모로 세분하고 책임과 권한을 줌으로써 각 개인의 활력을 높이고, 시장과 고객에 밀착하여 그들의 욕구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하는 수준 높은 경영을 하고 있다.명쾌한 비전과 공유된 가치관을 바탕으로 조직 안팎에 널리 분산된 지식과 정보를 통합하여 큰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있는 ABB는 조직통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는 좋은 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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